시랑

깍두기 공책 - 김륭

민트앤북 2025. 2. 7. 23:03


깍두기공책
                                

 

                                  김륭


한 칸에 한 글자씩밖에 살 수 없다

글자들이 문득 불쌍해진다

공책이 깡패다!

이건  붕어빵 틀 속의 붕어빵이나
식탁 위에 떨어진 깍두기와는 분명히
다른 문제다

둥근 접시 위에 놓인 치즈케이크처럼
달콤하게 쓴 그 애 이름마저 깡패들에게
끌려가 상자 안에 갇혔다

나는 지금 수학 문제를 풀 듯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

정의의 용사가 되어 깡패들을 물리치고
그 애를 구해 낼 방법을
찾고 있다

지금 공부가 문제가 아니다
공책이 감옥이다

                                                                  <햇볕 11페이지> 중에서



아들이 어렸을 때를 소환해 준 시다.

아들은 글씨를 잘 쓰지 못했다.

한글도 모르고 들어간 1학년의 시간을 글자를 배우느라 바쁘게 보내며 삐뚤빼뚤 글씨를 썼다.

2학년이 되어서는 깍두기공책에 글씨를 쓰게 했는데 그 네모칸 안에 제대로 글자를 넣지 못했다.

삐뚤빼뚤인 글자를 고치 주시겠다고 담임  선생님은 깍두기공책에 매일 글자를 쓰게 하셨다.

그런 각고이 노력 끝에 아들은 칸 안에 글자를 맞추기 시작했고 

글자도 정성스레 쓰기 시작했다.

왜 틀 안에 글자를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의 항변은 깍두기 공책에 묻혔다.

글씨를 틀 안에 가둬놓는다고 왜 그래야 하냐는 말에 헛음을 지었던 옛날이야기.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떤 규격 안에 있어야 안정을 느끼는 것 같다.

깍두기공책, 줄공책이 그렇다.

그러다가 하얀 백지를 만나면 어디다 뭐를 얼마큼 채워 넣어야 할지 모른다.

칸과 줄에 맞춰 살았기 때문에 칸과 줄이 없으면 순간 백지가 되어버린다.

 

우리 안에 칸과 줄을 얼마나 긋고 살고 있는지